2024-09-03 17:24
어제는 소녀를 만나 술을 마셨다. 스물 몇 정도는 어린이로 느껴지니 편의상 소녀라고 하자. 우리는 중학교 하교 시간 에 만나 청소차가 아스팔트를 훑는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식당에서, LP바에서, 주점에서.
나는 소녀의 남성편력사를 들으며 킬킬대고, 소녀는 소싯적 나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빛낸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주정뱅이들.
기억에 남은 대목은 “남자의 면도는 여자의 제모와 같다!” 정도? 자기 말에 취한 소녀는 손으로 테이블을 탕 탕 치며 면도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놀란 미어캣처럼 돌아보는 손님들. 정지된 공간. 또렷한 재즈 선율.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각자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들. 멋쩍게 마주보며 웃는 소녀와 나. 바텐더. 온더락 잔.
다시 만날 때는 코트나 파카를 입고 있겠지. 신나게 말을 쏟아내는 널 보면 나도 꽤 쓸만한 어른이 된 것 같았어. 페미니스트라는 그 언니는 소개 안 시켜줘도 돼. 반가웠다고, 검은 머리 소녀.